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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익다

책,익다 이야기

2021년 1월, 홍대 골목 안쪽 2층

2021년 1월, 홍대 골목 안쪽 2층에 책,익다가 문을 열었습니다. 책바로도, 북카페로도, 책펍으로도 불리지만, 책방지기 캐미가 혼자 꾸려가는 작은 공간이라는 사실은 한결같습니다. 한때 재무 부서에서 일하던 직장인 시절, 남들보다 이르게 출근하고 늦게까지 남아 일하던 나날 끝에는 조용히 앉아 있을 자리 하나 마땅치 않았습니다. 와인 한 잔 곁에 두고 책을 읽는 오랜 즐거움을 누릴 곳도 없어, 없다면 만들면 된다는 마음으로 책,익다를 직접 꾸렸습니다. 지금도 낮의 다른 일을 마친 저녁 일곱 시면, 책방지기는 이곳의 문을 엽니다.

유리문에 붙은 '책,익다 2F' 간판

이름에 담은 바람

책,익다라는 이름에는 바람 하나가 담겨 있습니다. 와인이 시간 속에서 서서히 익어가듯,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의 마음도 그렇게 익어가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책 한 권과 술 한 잔이 사람 사이를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데워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책방지기는 이 공간이 서두르지 않는 곳이 되도록, 오늘도 하루하루를 꾸려갑니다.

말을 덜어낸 자리

책,익다를 이루는 핵심 단어는 몰입입니다. 대화를 기본적으로 덜어낸 이 공간에서는, 한 번 자리를 잡은 손님이 서너 시간을 머물러도 개의치 않습니다. 두세 자리에 한 사람 정도가 적정하다고 여기기에, 자리가 꽉 차는 순간은 책방지기가 가장 마음을 쓰는 때입니다. "손님이 몰리면 한두 자리가 비어 있어도 불편할 테니 조금 뒤에 와달라 조심스레 부탁한다. 그러나 괜찮다고, 찾아온 김에 그냥 머물겠다고 말하는 이들을 보면 도리어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 그 미안함도, 이 공간을 지키는 마음의 일부입니다.

램프 불빛 아래에서 책에 몰입해 있는 손님

서가에 담은 마음

책,익다의 서가는 베스트셀러 목록보다, 오늘 이 공간을 찾은 이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며 채워집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에세이와 심리학, 철학 책들이 맞이하고, 그 곁으로 소설이 자리를 잡습니다. 매대와 서가 안쪽에는 독립출판물이 유독 많습니다. "이름난 저자의 손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써 내려간 책일수록 꾸밈없는 솔직함이 묻어난다고 본다. 그래서 의도하진 않았으나, 서가엔 독립 출판물과 에세이가 많다." 그 솔직함이, 이 서가를 채우는 기준입니다.

창가의 쪽지들

창가에는 조용히 펜 한 자루와 종이 몇 장이 놓여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이곳에 앉은 사람들은 좀처럼 남에게 털어놓지 못한 마음을 그 위에 눌러 적고 갑니다. 행복이 별다른 게 아니라는 말을 남기고 간 손님도 있었습니다. 누군가 적어둔 문장이 다음에 앉은 사람의 눈에 오래 머물고, 그 마음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건너갑니다. 창가의 쪽지들은 그렇게, 얼굴 모르는 사람들 사이를 조용히 오가며 서로를 다독입니다.

유리창에 손글씨로 적힌 질문과 손님들이 남긴 메모 카드

어떤 밤이든

어떤 밤이든 좋습니다. 혼자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밤도, 여럿이 둘러앉아 마음을 나누는 밤도, 각자의 속도대로 흘러가면 그뿐입니다. "바라는 모임의 형태는 느슨한 연대에 가깝다. 혼자만으로는 살 수 없으나 그렇다고 모든 것을 내보이고 싶지도 않은, 그 사이 어딘가의 거리다. 내가 없더라도 비슷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점과 점처럼 맞닿아 이어지는 공동체가 되길 바란다." 책방지기 캐미는 오늘도 그 거리를 지키며, 문을 엽니다.

손님들이 남긴 메모 카드로 가득한 벽